밭의 가을걷이를 끝내고 꽃밭의 정리까지 마무리하고 난 이후 시간의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어느새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으니 말이다. 꽃밭과 텃밭이 휴면에 들어간 시기인지라 그들의 기록을 남기는 일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쉬고 있지만 사실 그건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식물들은 차가워진 온도에 적응하기 위하여 뿌리만 남아서 겨울을 보내고 양분을 저장하기 위하여 잎을 다 떨군 채 처절하게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나는 왜 이 생명들 뒤에 숨어 웅크리고만 있는가?
삭소롬의 학명은 스트렙토카르푸스(Streptocarpus saxorum)이다. 최저 월동 온도가 8도이므로 노지에서 한반도의 겨울을 넘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삭소롬을 키울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 어느 날 튤립 구근을 사러 갔던 화원의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준 식물이 바로 이 삭소롬이다. 이름은 귀동냥하여 들어 본 적이 있으나 일단 노지월동이 안 되는 품종이므로 나의 관심에서 배제되었던 까닭에 속으로는 차라리 서비스를 줄 바엔 구근 한 개를 더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이 아이를 데려왔다. 직사광선보다는 창에 걸러 들어오는 빛을 좋아한다고 하여 거실 창가에 놓아두고 있다. 잎은 마치 다육이처럼 두꺼워서 물을 자주 줄 필요는 없으며 비교적 순둥하게 자라는 식물이라기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지난 12월 초에 꽃을 피웠다. 보라색 꽃잎이 어찌나 예쁘던지!
아주 작은 모종을 얻은 것이라서 올겨울에는 꽃을 기대하지는 않고 순 지르기(식물의 줄기나 가지 등의 끝부분을 제거하는 것)만 했는데 동그란 아기 얼굴 닮은 잎 사이로 하늘거리는 보라색 꽃이 피었다. 한쪽이 지고 나면 또 다른 줄기 사이에서 꽃대가 올라와서 한 달 동안 대략 7-8 송이의 꽃을 보았다. 꽃의 모양은 마치 바이올렛을 닮았다.
마치 아가의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처럼 잎을 가득 채운 저 뽀얀 솜털 어쩜 좋아! 그러나 2025년 1월 8일 현재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아마도 휴면에 들어간 듯싶다. 잎이 쪼그라들고 전체적인 얼굴이 수척하다. 나는 또 그 모습에서 나를 투영한다. 말라죽었나 싶어 잎을 만져보니 보기와 달리 수분을 가득 머금어 단단하므로 분명 주무시고 계시는 게 틀림없다. 처음에 나에게로 올 때 작은 모종이었고 꽃을 피우기는 했어도 지금의 모습은 영 션찮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이 첫겨울을 잘 살아낼 것이다. 잎꽂이, 물꽂이 등 번식도 쉽다고 하니 내년이 더욱 기대되는 식물이다. 식물의 성장은 시간이 만들어 낼 것이다.
'라이프 > 가드닝 텃밭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깨, 모종 정식에서 수확까지 (1) | 2024.11.27 |
---|---|
11월에 피는 꽃 (1) | 2024.11.20 |
텃밭에 가을 냉이가 지천이다. (0) | 2024.11.19 |
다알리아 구근 캐기 (1) | 2024.11.14 |
빨강 구절초의 개화시기가 가장 늦다 (2) | 202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