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파가 쓰러졌다. 이젠 나의 소명을 다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노라 말하는 듯, 마치 배 째라는 듯 그냥 뒤로 누워 버렸다. 아뿔싸! 두 주일을 건너뛰고 보름 만에 찾은 승정원에서 쪽파가 가장 먼저 나에게 항의를 한다.
작년 여름 정선5일장에서 구입한 쪽파 종근을 노지에 심어 잘 키웠었다. 심어만 놓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컸다. 덕분에 수시로 뽑아서 양념으로 쓰고 파김치도 담그고 늦가을에 김장 재료로 쓰기도 했다. 다양한 음식에 쓰임이 아주 많은 훌륭한 식재료이다. 쪽파는 충분히 월동을 하는 채소이지만 노지에서 겨울을 보내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추위가 오기 전 한 무더기를 캐어 비닐하우스 안에 다시 심어주었다.
겨울을 무사히 보낸 쪽파를 한 개씩 분리하여 지난 3월 하우스에 줄 맞추어 다시 심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시 심은 쪽파가 쓰러질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다시 잘 자라려니 했다. 번식 끝판왕이니 다시 스스로의 몸에 새끼 종근을 달아 폭풍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여름에 쪽파 김치를 담그리라 미리 김치국물도 마셨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여 지난 시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만 것이다. 깜짝 놀라 인터넷을 뒤져가며 원인을 찾았다. 아뿔싸! 쪽파가 이제는 휴면으로 들어가 여름잠을 자겠다는 신호인 것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무지한가! 이 시기에 쪽파가 쓰러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동안 먹기에만 바빴던 나를 반성한다. 자세히 보니 약 25개의 쪽파 중 네 개에서 꽃을 물었다. 완전히 개화하지는 않았지만 줄기 끝에 꽃을 피우려고 준비 중인 쪽파만 쓰러지지 않았다. 신기한 현상이다. 일부는 씨앗으로 번식하기로, 일부는 구근으로 번식하기로 자기네들끼리 무슨 협약이라도 맺었을까? 쪽파는 씨앗으로 번식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구근으로 번식하는 것이 훨씬 쉽다. 서둘러 구근을 캐보니 한 개의 구근에서 이미 자구가 생겨 4~5개의 자손을 낳았다. 기특하기도 하다.
신문지 위에 나란히 줄 맞추어 눕혀 놓았다. 하우스에 감자와 각종 파종이들을 위한 자동 급수장치를 해놓을 탓에 쪽파에도 약간 과습이 왔다. 쪽파는 과습을 싫어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한 탓에 일부는 무르기도 했다. 줄기를 자르고 말리면 썩을 확률이 높으므로 그대로 말려야 한다. 쓰러진 몸을 회복시켜 잘 말린 다음 2~3 개월 후 다시 땅에 심을 것이다. 작년의 경험에 의하면 작은 구근 하나가 약 40배로 불어 날 예정이다. 이 보다 더 가성비 좋은 작물이 또 있을까? 이젠 쪽파의 일생을 경험하였으니 한 번 구입한 종근으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리라! 쪽파야 부디 여름잠을 잘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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