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땅에 묻어 두었던 튤립의 구근을 수확하였다. 추운 겨울을 땅 속에서 보내고 봄에 꽃을 올려 그 화려함으로 마음 설레게 했고 장마가 시작되는 6월에 생을 마감하는 8개월 간의 여정을 정리하였다.
튤립은 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구근초로 남동 유럽과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다. 내한성 구근초로 가을에 심으며 원줄기는 곧게 서고 갈라지지 않으며 잎은 밑에서부터 계속 어긋나고 밑부분은 원줄기를 감싼다.
승정원의 튤립은 2023년 봄에 수확한 구근을 같은 해 11월 땅에 얼기 전 11월 마지막 주에 심었다. 강원도의 매서운 추위를 잘 이겨내라고 왕겨이불을 곱게 덮어주었고 이듬해인 올 3월에 어린싹들이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주었다.
언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꼬물꼬물 올라오는 새싹의 모습은 희망과 설렘 그 자체이다. 주말에만 찾는 꽃밭이기에 쑥쑥 자라는 새싹들의 얼굴을 지켜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의 시계에 발맞춰 꽃봉오리를 맺고 드디어 개화한다.
꽃의 절정이 끝나면 잎의 색이 누렇게 변하고 거만하게 고개 들고 있던 잎들도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튤립의 꽃을 자르거나 꽃대를 뽑으면 절대 안 된다. 초록의 잎들이 열심히 광합성을 하며 만들어 낸 양분을 땅속의 구근에게 전달하여 구근을 키우고 자구(子球 : 식물의 어미줄기에 기대어 발생한 새끼球)를 낳기 때문이다. 화려한 꽃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되는 모양이지만 사람의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화려함 뒤에 반드시 민낯이 있기 마련이니까! 사실 이 시간을 견디는 건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꽃밭이 미워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른 땅으로 옮겨서 다시 심어 자구를 키운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시간들을 감내하고 기다렸다.
잡초에 파묻혀 늙고 미워진 튤립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은 장마로 인해 땅이 습해지기 전에 구근을 캐내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기에 물러진 것은 없는 듯하다. 땅을 파고 보니 올망졸망 어미 몸에 기대어 아기구근들이 탄생하였다. 이런 신비로움이란! 성질 급한 어떤 녀석은 벌써 싹을 올리기도 하였다. 워워~~ 진정하시게나!
수확한 구근들은 잘 보관하였다가 올 가을에 다시 땅에 심어주면 된다. 보관이 뭐 특별한 건 아니다. 바람이 잘 통하게 바구니나 양파망에 넣어 한편에 놔두면 된다. 작은 아이들은 내년에 땅 속에서 몸집을 키울 것이고 다 자란 아이들은 분명 꽃을 피울 것이다. 캐고 보관하고 다시 심고 하는 일이 살짝 번거롭긴 하다. 그러나 만개하였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번거로움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아니 감수해야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새 생명의 탄생은 분명 축복할 일이다. 식물들은 저들만의 방식으로 번식을 하고 생을 마감한다. 화려했던 튤립도 그렇게 8개월 간의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냥 가지 않았다. 내년의 시간을 미리 선물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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